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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툴대지만 마음은 따뜻한 사람, 그게 기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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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8. 20. 06:00

[인터뷰] 배우 이원장
연극 '나의 아저씨'서 박기훈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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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방영된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서로 다른 세대의 두 인물이 각자의 상처를 품은 채 만나, 무심하지만 깊은 연대와 위로를 나누는 이야기다. 무거운 현실을 살아가는 중년의 남자 박동훈과, 감정을 닫아버린 청춘 이지안이 서로를 지켜보며 조금씩 변화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 '나의 아저씨'가 연극 무대 위로 옮겨진다. 고요한 화면 속 깊은 감정을 마주하던 순간들이, 이제 관객과 호흡하는 무대 위에서 다시 살아난다. 연극으로 재탄생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단연 박동훈과 이지안이었다. 많은 관객들에게 이 작품은 그 두 인물이 서로를 감싸 안으며 삶의 무게를 버텨낸 이야기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옮겨보면, 그 풍경의 가장자리에 언제나 묵묵히 서 있던 또 한 사람이 있다. 실패한 영화감독, 청소방 동업자, 그리고 말수가 적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 우리는 그를 박기훈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제, 무대 위에서 다시 살아나게 될 이 인물을 맡은 배우 이원장을 만났다.

고요한 위로의 이야기는 오는 2025년 8월 22일부터 9월 27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U+ 스테이지에서 관객을 만난다.

이원장은 박기훈을 단순히 '형제 중 막내'로 축소하지 않는다. "기훈이도 자기 이야기를 가질 자격이 있는 인물"이라는 그의 말에는 강한 확신이 담겨 있다. 드라마 속 기훈은 입봉을 앞두고 무너진 영화감독이다. 실패와 자책, 그리고 오랜 좌절 속에서도 그는 삶을 내려놓지 않고 버텨낸다. 그런 인물이 다시 한 번 걸음을 떼는 장면은, 작지만 깊은 울림을 남긴다.

"원작이 워낙 인상적인 작품이라 부담도 컸어요. 이미 많은 분들이 기훈이라는 인물을 기억하고 계시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 기억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저만의 색깔을 입혀보고 싶었어요." 이원장은 기훈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그리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다양한 층위를 조심스럽게 꺼내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있다.

기훈은 겉으론 거칠고 무심한 말투로 사람들을 대하지만, 속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한 인물이다. 이원장은 바로 그 이중성을 무대 위에 구현하는 데 진심을 쏟고 있다. "툴툴거리고 툭툭 내뱉는 말 속에 형에 대한 걱정, 사람에 대한 애정이 숨어 있어요.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사실은 늘 주변을 살피는 사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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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훈을 한 단어로요? 전 '술'이라고 생각해요." 거칠고, 부드럽고, 아픈 감정이 겹쳐진 인물. 이원장은 기훈의 복합적인 감정을 무대 위에 투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고요한 몰입을 이어가고 있다. / 사진 본인 제공
드라마에서는 그 복잡한 감정이 대사보다는 표정과 카메라 앵글을 통해 전달됐지만, 연극에서는 그 모든 것을 배우의 신체와 호흡, 말과 침묵으로 전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툭' 던지는 말보다 오히려 '쉬는 숨'과 '멈칫함'에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기훈만의 문제는 아니에요. 연극은 모든 인물이 함께 호흡하는 공간이니까요. 함께하는 배우들과 리듬을 맞춰야 진짜 장면이 나와요."라고 그는 말한다. 장면마다 대사를 넘어서 '기운'을 맞추는 것이, 연극이라는 생생한 공간에서 기훈을 살아 있게 만드는 핵심이라 믿는 것이다.

형 박동훈과의 관계는, 이 작품의 가장 복잡한 결 중 하나다. 기훈은 형을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의 존재 앞에서 스스로를 더 작고 무능하게 느낀다. 그래서 형에게 솔직해지는 데는 늘 주저함이 앞선다. "기훈은 형을 제일 많이 생각해요. 근데 그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죠. 오히려 거칠게 표현해요. 사실은 그게 다 걱정이고, 애정인데요." 이원장은 이런 미묘한 거리감이야말로 기훈이라는 인물의 가장 인간적인 결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역시, 기훈이 형에게 '좀 울어라'고 말하는 순간이었다. "속마음을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 한 마디에 다 담겨 있어요. 저도 연습하면서 참 오래 머물렀던 장면이에요."

이 작품에서 술은 감정을 연결하는 매개로 자주 등장한다. 기훈도 술잔 앞에서 자주 진심을 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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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훈을 한 단어로요? 전 '술'이라고 생각해요." 거칠고, 부드럽고, 아픈 감정이 겹쳐진 인물. 이원장은 기훈의 복합적인 감정을 무대 위에 투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고요한 몰입을 이어가고 있다. / 사진 본인 제공
그래서일까. 이원장은 기훈을 한 단어로 표현해보자면 '술'이라고 말했다. "술이 그렇잖아요. 취하면 거칠기도 하고, 때론 부드럽고, 마음 아플 때도 있고. 다양한 감정이 나오는 거요. 기훈도 그런 인물이에요. 가볍게 웃다가도 어느 순간 눈물이 고이는 사람."

정정희와 같은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에서도 기훈은 단순한 '실패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말없이 다가서고, 조용히 위로하는 사람이다. 그 따뜻함은 꾸미지 않았기에 더 진심으로 느껴진다. 이원장은 그런 순간들을 '슬픔을 나누는 방식'이라 표현했다. "별다른 말 없이도, 자꾸 눈길이 가고, 신경 쓰고. 그런 장면들이 많아요. 기훈은 스스로 상처가 많은 사람이지만, 그래서 더 다정해질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연극 속에서 기훈이라는 인물이 어떤 무게로 스며들 수 있을지, 그는 여전히 고민 중이다.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이 인물이 극 안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어야 하거든요." 무대 위에서 기훈이 어떤 정서로 퍼져나가야 할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그의 태도는, 이 인물에 대한 깊은 애정과 존중에서 비롯된다.

이원장은 이번 연극의 매력을 "그때의 감성과 감동을, 배우들의 살아 있는 모습으로 다시 전할 수 있다는 것"이라 말했다. 텔레비전 화면 너머에서 흘러갔던 숨결과 침묵이, 이제 무대 위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 가운데 기훈이라는 인물은, 드디어 자기 몫의 이야기를 꺼내 놓을 준비를 마쳤다.

"기훈이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정말 흔한 형제 같았으면 좋겠어요. 내 친구일 수도 있고, 내 얘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요. 편하게 다가가주시면 좋겠어요." 이원장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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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훈이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정말 흔한 형제 같았으면 좋겠어요." 관객이 인물의 고단한 삶에 스며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원장은 말없는 서사를 조심스럽게 무대 위에 새긴다. / 사진 본인 제공
'나의 아저씨'는 흔히 박동훈과 이지안의 서사로 기억되지만, 그 이야기의 틈새마다 박기훈이 있었다. 무너져 있되, 사라지지 않았던 인물. 잊혀졌지만 끝내 잊히지 않았던 존재. 이제, 연극이라는 공간에서 그는 드디어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기회를 얻는다. 말수가 적고 눈빛이 많은 남자, 상처를 품고도 다시 걷는 사람, 박기훈. 이원장은 그 인물의 어깨에 담긴 삶의 무게를 무대 위에 고스란히 옮겨오고자 한다. 관객은 이번 무대에서 박기훈이라는 이름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가, 마침내 자신만의 서사를 시작하려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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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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