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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오늘날의 미국 회사법은 회사의 법인으로서의 의미를 애써 무시하고 공기처럼 실체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회사의 법인격이 중시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심지어 이사는 회사와 임용계약을 체결하고 주주는 회사에 자금제공계약을 체결하는 데 지나지 않아 이사와 주주 사이에는 아무런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델라웨어주 대법원이 이사는 주주에 대해 신인관계에 있어 그에 대하여 충실의무를 부담한다고 판단한 판결들이 소수이지만 찾아볼 수 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회사는 법인이므로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권리능력과 행위능력을 가지며, 계약, 소송 등 다양한 법률관계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게 확고한 법리로 자리 잡았다. 회사가 설립등기를 통해 그 실체가 완성되면 어지간하지 않는 한 그 존재가 무시되지 않는다. 자회사와 그 주식을 모두 가진 지주회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하나의 회사로 취급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이사와 주주 사이에는 계약관계가 없기 때문에 한국 상법은 이사는 자신에게 일을 맡긴 회사에 대하여 주의의무를 다하여 직무를 수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사의 충실의무를 주주에게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은 제21대 국회에서 시작하여 지속적으로 발의되고 있다, 상법 개정안은 글로벌 스탠더드인 미국법을 전범으로 삼아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방안을 조문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미국법상 이사의 신인의무를 한국 상법에서 인정하자는 것과 맥락을 함께한다. 그러나 이사에게 주주를 상대로 의무를 부담하라고 하는 현행 미국의 법현상을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보는 것은 너무 나간 것이다.
한국과 동일한 대륙법계에 속하는 일본과 독일은 이사는 회사가 위임한 사무를 처리하는 자로서의 지위를 가질 뿐이어서 명시적인 계약관계에 없는 주주에 대하여 직접적인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사가 주주에게 의무를 부담하는 것은 지극히 영국과 미국 등 형평법 전통을 가진 국가에 한하여 목격할 수 있는 국지적인 법적 현상이라고 평가하는 게 바람직하다.
법을 제정하거나 개정을 함에 있어서는 법적 체계와 안정성을 고려하여야 한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때에는 관련되는 규정을 모두 바꾸지 않는다면 법체계적인 측면에서 흠결이 노정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이미 명백하게 회사와 이사 사이의 관계를 위임관계로 정하고 있는 상법 제382조 제2항을 삭제하지 않고서 무턱대고 미국법상의 이사의 주주에 대한 의무를 국제적인 표준으로 삼아 도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법을 모델로 하여 이사의 충실의무를 주주에게 확대하려는 상법 개정안은 현행 법체계와 충돌된다는 점에서 출발점부터 잘못된 것이다.
한국과 일본처럼 대륙법적 전통을 가진 국가의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석·박사를 취득하더라도 원칙적으로 미국 로스쿨의 박사과정으로 바로 입학할 수 없다. 미국에서 법학 관련 박사학위를 취득하려면 적어도 석사학위부터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 한국 대학의 법전공자가 바로 박사과정 입학이 허용되지 않는 것은 한국의 법체계와 미국의 법체계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배운 법지식이 미국에서 그대로 통용되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미국법을 이해하려면 시작부터 다시 하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법학석사취득한 후 같은 성문법 중심의 법체계를 취하고 있는 일본이나 독일 대학의 법학박사 학위과정에 바로 진학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처럼 미국은 스스로가 자기네 법이 보편적이지 않음을 인정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미국의 국지적인 법 현상을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치부하면서 수용하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혹시 우리들 마음속 깊숙이에 숨어 있는 사대주의가 드러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미국의 법체계는 법리를 터득하고 적용함에 있어 우리의 그것과 차이가 커 항상 미국법 규정을 도입할 때에는 색안경을 끼고 들여다보아야 하는데 말이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 이사의 충실의무를 주주에게까지 적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한국의 법체계가 그대로 계수하는 것은 체계정합성을 무너뜨리는 일이므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권재열 교수는....
연세대 법대와 대학원 졸업, 미국 버클리대 로스쿨 법학석사, 조지타운대 로스쿨 법학박사 취득 후 현재 경희대 로스쿨에서 회사법과 자본시장법을 가르치고 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원, 한국상사판례학회 회장 및 로스쿨 입학시험인 LEET 출제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서는 "한국회사법의 경제학"(2019)와 "주주대표소송론"(2021) 등이 있다.
권재열 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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