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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린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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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7. 02. 14:24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그린라이트, 관용구로 허락 또는 승인을 의미한다. 한 종편채널 예능프로그램에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신호'라는 뜻으로 사용된 후에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후 2014년, 국립국어원은 그린라이트를 신어로 선정한 바 있다.

영화에서 활용되는 그린 라이트, 녹색의 이미지는 종종, '제 3의 존재' 또는 '영적인 존재'를 상징한다. 등장인물의 코스튬이나 조명 등을 활용한 미장센으로 디테일을 구성하며 흥미를 유발시킨다. 관객은 그 상징게임에 몰입하며 의미를 찾아나간다. 코드를 파악하기 어려울 땐, 평론가의 리뷰를 원용하며 사후적으로 게임을 완성해 나간다. 이제는 영화는 물론 TV 토크프로그램이나 유튜브 콘텐츠에서도 그린 라이트 조명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더 이상 특별한 상징코드가 아니라, 마치 보편언어처럼 다양하게 활용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녹색의 이미지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연출한 작품이 있다. 1986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누벨바그의 거장 에릭 로메로 감독의 영화 '녹색 광선(Le Rayon Vert)'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여름휴가를 같이 가기로 했던 친구가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우울해진 주인공 델핀의 방황을 그린 루즈한 형식의 로드무비이다. 텅 빈 파리에서 혼자가 된 주인공, 그런 델핀을 친구들이 도와주지만, 그녀의 우울감은 멈추질 않는다. 휴양지와 파리를 몇 번을 오가지만, 그럴수록 공허와 결핍만이 가중될 뿐이다. 그러다가 길에서 우연히 쥘 베른의 소설 '녹색 광선'에 관한 대화를 엿듣게 된다. "맑은 날 석양이질 때 드물게 발생하는 녹색 광선을 보게 되면 자신의 진심은 물론 사랑하는 이의 마음까지도 알 수 있다." 더 이상의 희망도 없이 파리로 돌아가는 기차역에서 마침내 델핀은 한 젊은 남자를 만난다. 그들은 해변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거기에서 함께 녹색 광선을 보게 된다.

영화 녹색 광선이 특별한 이유는, 상징을 디테일에 감추지 않는 데 있다. 도리어 등장인물이 의미를 부여해 가는 과정을 드러낸다. 흔한 시점 쇼트를 가능한 피하고, 거리두기로 주인공과 등장인물 간의 대화를 끝없이 관조하게 한다. 감정이입의 환영주의를 배제함으로써 갑갑하다 싶을 정도로 대책 없어 보이는 주인공을 바라보게 한다. 그녀는 자신을 따듯이 맞아주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때론 변덕스럽기까지 하다. 이로써 관객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객관적으로 그녀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고 나선 일종의 치유를 경험한다. '나는 저 정도는 아니지'하는 위로로 다가온다. 마치 거울치료를 하는 것처럼,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내면을 그녀에게서 발견하면서도, 그녀와 나와의 경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한편, 관객의 감정이입이 없기에 응원할 바도 없지만, 결과적으로 주인공 델핀은 영화의 마지막 '쌍방향 그린라이트'를 만난다. 답답해 보이는 델핀에게도, 자기암시의 주문으로서 상징이 아닌 눈앞에 진짜 '녹색 광선'이 펼쳐지고,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번 여름엔, 녹색이 진정한 사랑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과 의미 부여는 길에서 주운 녹색 카드, 벽에 붙은 녹색 전단으로, 영화가 원용하는 쥘 베른의 소설 녹색 광선으로 그 이야기를 매개해 주는 등장인물의 전언으로 수평선에 석양이 질 무렵, 해가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그 찰나의 순간 그린라이트는 기어이 빛을 발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함께할 이를 만나게 된다. 관객은 연출자가 유도한 상징 게임의 장에 투명하게 들어가기보다, 등장인물들이 직접적으로 매개한 의미 부여의 과정을 어떤 이입도 배제한 채, 그녀와 그의 그린라이트를 관조하게 한다. 이로써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바로 사랑하는 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우리의 생애주기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 시기가 있다. 사춘기가 그러할 것이며, 결혼 적령기가 또한 그러할 것이다. 때가 되어 짝을 만나는 일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화의 도입부에 나오는 랭보의 시구, '오! 시간이 되니 심장이 뛰는구나!' 생애주기에 우연하게 주고받는 심장의 이끌림에 운명처럼 짝을 만난다. 그러다가 결혼이라는 제도에 안주하기도하고 2세를 생산하며 가족을 구성해 왔다. 운명적 만남은 없다. 이끌림만으로, 어떤 제약도 간섭할 수 없다는 기세로 사랑할 때, 다만 그걸 운명이라고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랬고 성춘향과 이몽룡이 그랬다.

꼭 제도로서 결혼이 아니더라도, 어떤 조건도 없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사회, 그게 우리 사회에 그린라이트가 켜지는 출발점일 것이다. 국민에게서 권한을 부여받은 현재 권력과 기성세대는, 청춘들에게 지금⋅여기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그 자체로 미래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사회상을 제시할 의무가 있다. 사족으로 청춘들에게 감히 조언한다면, 나 자신은 물론 그녀 혹은 그가 소유한 '조건'이 반드시 미래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직시해야 한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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