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 안주 반도체 '환골탈태' 의지 천명
신뢰 인사 기조서 신상필벌 원칙 전환
삼성다움 위한 S급 인재 확보도 사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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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율과 획일, 이기주의와 권위의식, 흑백논리와 불신풍조에 깊이 젖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문제의식조차 갖지 못하는 도덕불감증에 걸려 있는 현실을 보면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이건희 회장이 임직원들에게 한 말이다. 그의 말 속엔 당시 삼성이 안은 고질적 문제점이 모두 담겼다. 선친 이병철 창업주의 뒤를 이어 삼성 경영을 맡은 5년간의 소회였다. 지난 17일 사즉생을 강조한 이재용 회장의 말에는 32년 전 아버지가 느낀 위기감이 그대로 담겼다. 흡사 '데자뷔'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필요한 시점에 나온 명쾌한 메시지"라며 "삼성 리커버리를 본격 선언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 1993 '애니콜' vs 2025 반도체?
이건희의 신경영은 지금의 삼성을 만든 변곡점이었다. 하지만 신경영은 한두 해에 성과를 낸 게 아니다. 근 10년간의 지난한 내부 투쟁 끝에 비로소 성과를 냈다. 이건희 신경영의 핵심은 양(量)이 아닌 질(質)로의 패러다임 전환이었다. 그리고 기술 중시의 문화 구축이었다. 이를 대표하는 퍼포먼스가 '애니콜 화형식'이었다.
이재용 회장도 '삼성다움'의 기본 문제의식으로 이건희 선대회장과 같은 점을 지적했다. 삼성 관계자는 "메모리와 파운드리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했다는 점에서 재건의 시작점을 정확히 짚었다"고 평가했다. 국내 1위에 안주했던 애니콜을 불태움으로써 삼성의 글로벌기업화를 추구했던 이건희 회장처럼, 이재용 회장은 1등에 안주한 반도체의 환골탈태를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셈이라는 얘기다.
삼성 안팎에선 반도체 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메스가 가해질 것으로 점친다. 메모리, 파운드리 사업에 대한 전면적 경영진단 가능성이 거론된다. 기존에 짠 로드맵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 작업도 뒤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2기 정책을 반영한 전략 수정도 있을 전망이다.
◇ 용인불의 vs 신상필벌
이재용 회장은 '삼성다움' 재건의 두 번째 키워드로 '인사'를 꼽았다. "신상필벌을 철저히 하고, 수시로 인사를 하라"는 게 골자다. 사실 이건희 회장 시절 삼성의 인사원칙은 '의인불용 용인불의(疑人不用, 用人不疑)'였다. 한번 믿고 맡기면 끝까지 신뢰하는 게 이건희식 인사였다. 신상필벌은 연말연초 정기 인사 때에 적용된 원칙이었다. 이재용 회장도 몇몇 예외는 있었지만 대체로 이와 같은 원칙을 따랐다. 그랬던 이 회장이 신상필벌과 수시인사를 꺼낸 건 그만큼 조직 내부의 긴장감이 느슨해졌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최근 몇 년간 메모리 분야에서 한두 차례 수시인사를 냈지만, 이 정도를 넘어선 깜짝 인사를 할 수 있다고 경고한 셈이다.
재계에선 신상필벌, 수시인사라는 키워드가 당장 올 상반기 중에 적용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전망한다. 작년 말 진용을 다시 꾸린 반도체 3대 사업부를 비롯해 DX(TV, 스마트폰) 부문, 계열사까지도 수시인사의 타깃이 될 수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S급 인재 확보 재개
'삼성다움' 세 번째는 S급 인재 영입이다. 국적·성별과 상관없이 인재를 확보, 삼성 고유의 회복력을 되찾아야 한다는 게 이 회장의 판단이다. 최근 삼성은 우수 인재가 조기에 이탈하는 문제를 겪어왔다. 삼성전자 사업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퇴임한 임원은 총 31명이다. TSMC 출신인 반도체 패키징 전문가 린준청 부사장과 퀄컴에서 영입한 이성원 상무 등 DS부문에서만 10명 이상이 회사를 나왔다. 재계 관계자는 "그간 이 회장이 기술 인재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해 왔지만, 경직된 조직 문화와 단기 성과주의 등이 맞물리면서 이탈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며 "인재 제일이라는 경영철학에 걸맞은 조직 개선이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