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이경욱 칼럼] 트럼프의 엄지손가락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2.asiatoday.co.kr/kn/view.php?key=20241202010000915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12. 02. 18:06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보면 옛 로마 제국 황제들의 전횡이 상세히 나온다.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못하게 취급하고, 주변국을 짓밟고 영토를 확장하는 데 혈안이 된 황제들의 화난 모습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로마 원형 경기장에 모인 군중을 향해 의견을 직접 묻고 결정을 내린다. 직접민주주의 원형이라는 의견도 있겠지만, 그 내용과 무모함에서 끔찍함을 느끼게 된다. 주로 노예 출신의 검투사를 원형 경기장에 몰아넣고 맹수 및 듣도 보도 못한 괴물과 싸우도록 한다. 때로는 동료들과 목숨을 담보하는 경기를 치르도록 한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한솥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덥고 잠자던 동료를 무참히 살해한다. 글래디에이터 2편은 1편보다 더욱 잔인한 영상을 보여준다.


2편에 등장하는 황제는 심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측근의 의향에 놀아나고 여론의 향배에 과도하게 신경을 쓰느라 쇠약해져 가는 측은한 모습의 황제를 잘 묘사하고 있다. 로마의 노회한 집정관과 원로원 구성원들과의 정치적 줄다리기보다는 자신의 영달과 부귀영화만 추구하는 나약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그가 강력한 인상을 줄 때가 있다. 검투사 목숨의 향방을 결정할 때 드러나는 광기 어린 눈빛이 잔인할 정도다. 검투사들은 이기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사력을 다한다.


공격을 못 이겨 드러누운 검투사의 목숨은 황제의 엄지손가락에 달려 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 살려두는 것이고, 반대로 땅을 향하게 하면 그 즉시 목숨을 잃게 된다. 그곳의 군중, 실제로는 로마의 부유한 계층들은 엄지손가락 향배에 환호한다. 목숨을 앗아달라고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향하게 하면 그걸 여론이라고 황제는 받아들이기도 한다. 아무튼 엄지손가락은 로마 시대 폭력의 상징이 됐다.


그로부녀 30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2024년 11월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 당선자는 엄지손가락을 높이 치켜들면서 대통령 자리로의 귀환을 온 세상에 확인시켰다. 그는 4년 전 45대 미 대통령에 당선됐다. 혀를 내두르게 하는 가질리어네어(gazillionaire)다. 엄청난 재산을 소유한 초갑부다. 매우 크며 한계가 없는 숫자를 뜻하는 단어인 가질리언(gazillion)과 백만장자를 뜻하는 밀리어네어(millionaire)의 합성어인 가질리어네어는 재산의 범위를 확정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부자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런 그가 또다시 미 대통령이라는 '가질리언파워(gazillionpower)' 가 됐다. 강력한 기축통화 달러를 기반으로 3억5000만명의 인구를 지닌 미  합중국 대통령은 비교 불가한 가질리언파워에 속한다. 블라디미르 푸틴도 가질리언파워이긴 하겠지만 트럼프에 한참 못 미친다.

이제 세상은 트럼프의 엄지손가락에 달려 있다. 자국 이익을 위해서라면 상대방 배려보다는 기업가 정신을 앞세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아래로 향하게 하기도 할 것이다. 트럼프는 요즘 한창 백악관으로 함께 들어갈 장관 후보자들을 고르느라 바쁘다. 마치 텔레비전 쇼처럼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런데 장관 지명자들이 한결같이 막대한 재산의 소유자들이어서 이제 부와 명예, 권력을 함께 거머쥐는 게 요즘 정치인들의 속성이 되고 있는 추세다. 서민 고충을 알기나 할까. 이런 현상은 8년 전 트럼프 내각 장관 지명자들의 재산 보유 현황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었다. 


트럼프가 이제 엄지손가락을 통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트럼프는 45대 대통령 재직 시 특정 사안에 대해 거침없는 언행으로 세상을 들썩여 왔었다. 다시 재선이 안 되는, 47대 미 대통령직을 수행하더라도 이전의 모습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재선의 기회가 없어 이전보다 더 강력한 파워를 휘두르지 않을까 싶다. 물론 반대의 의견도 있겠지만, 그의 품성과 언행 등을 고려해 볼 때 엄지손가락 정치는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강한 달러화, 자국 우선주의를 선택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우리를 포함한 군소 국가들의 형편을 깡그리 무시한 채 로마 황제처럼 자국 이기주의의 길을 걸어갈까 우려된다. 당장 종전을 앞둔 분위기의 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떤 쪽으로 마무리될까. 중동전은 어디로 갈까. 미국 위주로 세계 반도체 산업을 재편하는 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까.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그는 또다시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과 드라마틱하게 대면하는 장면을 연출할까. 그 결과는 무엇일까. 우리의 핵 무장화에 대해 그의 엄지손가락은 어디로 향할까. 


취임 전 관세를 대폭 올리겠다고 선언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고 있는 그다. 불법이민·마약 이유로 3대 수입국인 중국·멕시코·캐나다를 콕 찍어 발표했다. 이들 나라에 공장을 지어놓은 우리 대기업들도 당장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대미흑자 해소·방위비 압박 위해 우리에게도 관세카드 활용 가능성이 있다. 우리를 포함해 거론되는 국가들은 좌불안석일 게다. 트럼프는 유세 때 '관세는 사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고 여러 차례 언급하면서 '관세 카드'만 있으면 글로벌 기업의 해외 공장을 미국으로 유치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엄지손가락에 유난히 관심을 두게 되는 요즘이다.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