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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조 박사의 정치경제 까톡] 민중주의에는 민중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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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4. 10. 29. 17:56

슬픈 라틴아메리카 잃어버린 100년 (6)
이영조
이영조 전 한국라틴아메리카학회 회장
라틴아메리카에서 농촌과두세력의 지배는 산업화와 새로운 도시 사회세력의 등장으로 도전받기 시작한다. 이들의 지배력은 1930년대 대공황으로 인한 1차산품 수출 가격 폭락으로 크게 약화된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정상적 방법으로는 정권 탈환이 불가능하다고 본 과두세력은 1930년 군부를 끌어들여 제2차 이리고엔 정부를 끌어내렸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사실상 군부의 지배하에 있었다. 하지만 이미 뿌려진 민중주의의 씨앗은 계속 자라고 있었다. 1943년 아르투로 라우손 군사정부에서 노동장관을 맡은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on)이 친(親)노동정책으로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다.

브라질에서는 1930년 브라질식 아침에 빗대어 cafe com leite(우유 탄 커피)로 불리던 상파울루주(커피)와 미나스제라이스주(축산) 연합의 내분을 틈타 남부 히우그랑지두술주 출신의 부호 정치인 제툴리오 바르가스(Getulio Vargas)가 쿠데타로 집권했다. 이후 바르가스는 '신(新)국가(Estado Novo)'로 불리는 독재정권을 세워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한편 다양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통해 조직노동을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적인 민주화 물결 속에 이 두 나라에 헌정이 회복되자 민중주의는 정권으로 만개했다. 브라질에서는 1945년 바르가스가 민주적 선거를 통해 재집권했다. 브라질의 민중주의 정권은 1964년 군부가 개입해 군부 독재정권을 세울 때까지 이어졌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946년 선거에서 페론이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됐다. 1954년 군부 쿠데타로 페론은 실각하지만 페론주의는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지난 수십 년간 아르헨티나는 페론주의와 이의 득세를 저지하려는 다른 세력의 각축장이었다.
◇ 선거연합으로서의 민중주의

그렇다면 이 시기에 개화한 남미의 민중주의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미 이리고엔 정부의 등장에서 확인했듯이 민중주의는 일차적으로 농촌과두세력에 대항하는 도시 세력들의 다계급 선거연합이었다. 도시 세력들이 다계급연합을 형성한 것은 주요 사회세력의 역관계를 고려할 때 당연한 결과였다. 농촌과두세력은 수출경제의 위기를 겪으면서 약화되긴 했으나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첫째, 약해는 졌지만 여전히 강한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수출을 통해 외화를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둘째, 정치적으로도 중앙정치 무대에서는 밀렸지만 지방정치를 장악함으로써 여전히 큰 힘을 지니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여전히 강한 과두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신생부르주아지, 중간계급, 조직노동 등 도시부문의 주요세력을 포괄하는 다계급연합이 필요했다.

이 선거연합에서 실탄(표)을 제공한 것은 조직노동이었다. 민중주의가 자라난 시기는 투표권이 급속히 확대된 시기였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이리고엔이 집권한 1916년 선거 때 투표자는 75만이었지만 2차 집권한 1928년에는 146만으로 거의 배가 늘어났다. 페론이 당선되는 1946년 선거 때는 287만으로 급증했다. 브라질의 경우 구 공화국(1889~1930) 이래 투표권이 문자해득자에게만 제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기회가 그나마 존재했던 도시인구가 늘면서 유권자가 크게 늘었다. 1930년 구 공화국 마지막 대통령선거 때 190만이었던 투표자는 바르가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1945년에는 620만으로 급증했다.

◇ 민중 없는 민중주의

이 다계급연합을 주도한 것은 민중주의의 생성기부터 중상층이었다. 이것은 이리고엔, 페론, 바르가스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내각에는 심지어 구 지배층인 과두체제의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른바 민중이 민중주의를 주도한 적은 없었다. 농촌과두세력에 대항할 무기(표)를 공급한 것은 조직노동이었지만, 이리고엔 정부의 예에서도 확인했듯이 통제된 동원(controlled mobilization)의 대상에 불과했다표를 위해 동원은 하지만 연합 내의 다른 계급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일정한 통제가 필요했다. 훗날 이 통제가 제도화된 것이 국가조합주의적 노동통제였다. 조직노동에 대해 정치권과 사회권을 인정했지만 자발적 정치적 표현에는 일정한 한계가 설정되었다.

◇ 누가 민중?

한 가지 주목할 사항은 민중주의는 민중을 내걸었지만 막연히 '민중'(스페인어 lo popular, 포르투갈어 o povo massa)이라고만 했을 뿐 누가 민중인지는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민중은 "반(反)민중"에 의해 소극적으로 규정되었다. 반민중이 아니면 민중이었다. 이것은 연합 내부에 존재하는 이질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고 연합의 규모를 극대화하는 데 유용했다. 민중의 내포와 외연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상당히 달라질 수 있었다. 훗날 학자들은 이렇게 가상의 적을 만들어 민중을 규정하는 것을 '타자화(othering)'라고 하여 민중주의의 일반적 특징 가운데 하나로 꼽게 된다.

◇ 문제는 돈

도시의 다계급연합을 유지하는 데는 당연히 많은 돈이 필요했다. 게다가 여전히 강한 농촌과두세력 또한 도외시하기 어려웠다. 결국 사회의 모든 세력에게 뭔가를 나눠줘야 하는 게 민중주의의 숙명이었다. 처음에는 수출경제로 쌓아둔 돈이 있었다. 하지만 곳간은 곧 비었다. 이때 분배와 성장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묘책 아닌 묘책으로 등장한 것이 수입대체산업화였다.

이영조 (전 한국라틴아메리카학회 회장)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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