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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길 위에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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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4. 02. 01. 17:57

이황석 문화평론가
김대중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영화 '길위에 김대중'이 극장 상영 중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왜 제목이 길 위에서인지 생각해 보았다. 오랜 독재체제 아래 겪은 수많은 박해, 다섯 번의 죽을 고비 그리고 40년간에 걸친 대권 도전 끝에, IMF 사태로 위기에 처한 나라의 수장이 되어 국난을 극복한 대한민국 15대 대통령, 노벨 평화상 수상자 김대중. 그런데 일종의 수사와 같은 앞의 문장에는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그가 걸어온 길은 고난을 이겨내게 한 신념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큐멘터리에 구현된 인간 김대중은 범상치 않은 인물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에 관해 별다른 감흥 없이 막연하게 생각한 사람들조차도, 정치 현장에서는 냉철한 현실주의자이면서 동시에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던 그의 투사적 면모를 접하곤 경외감이 들었을 것 같다.

한 예로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의 한일 협정에 무조건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회로 논의를 끌고 들어와 논리적으로 정권이 벌이는 협상의 허접함을 드러내게 함으로써 현실적 대안을 모색했던 철저한 '의회주의자'였다. 또한 전두환 정권에 맞서 결연하게 투쟁하면서도, 군부에게 국가폭력을 행사할 빌미를 제공하지 않게끔 폭력적인 시위를 경계했던 평화주의자였다. 영화는 그와 같은 사실을 차분한 톤으로 면밀한 자료와 함께 김대중의 육성을 화면에 적절하게 배치하며 그를 잘 모르는 세대들에게도 많은 정보와 감동을 전달하고 있다.

한편 대중으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았던 정치인 김대중은 그 반대편으로부터 오랜 세월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여졌고, 정치적 모함으로 지역주의에 기생한 교활한 정치인이라는 평판에 시달려야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적어도 현실정치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김대중 정신을 계승한다거나 혹은 계승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형편이니 격세지감이란 생각이 든다. 여하튼 분명한 것은 그가 걸어왔던 길이 대한민국 현대사의 민주주의와 궤를 같이한다는 사실에 관해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연장선에서 끊임없이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수호하고자 했던 김대중은 대한민국이 걸어온 가혹한 현대사와 동일시된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다큐멘터리 '길위에 김대중'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인간 김대중의 위대함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길'이란 것이 얼마나 모진 풍파를 헤쳐내며 쟁취해야 할 가치인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사람들은 흔히 '길'이란 단어를 연상할 때 루쉰을 인용하곤 한다. 그런데 중국의 문호 루쉰을 거세한 채 루쉰의 말을 차용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길에 관해 루쉰이 했다는 말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에는 길이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의 길은 절망에 놓여 있지만, 전례가 없어 보이지 않는, 희망을 구하고자 하는 절규의 결과다. 그 길의 시작은 스스로를 던져 미래세대의 가교가 되고자하는 선구자의 헌신과 고행에 있다. 그와 뜻을 같이하는 민중들이 연대하며, 기꺼이 동행하는 여정이 도도한 흐름을 이뤘을 때 그것은 비로소 길이 된다.

그런데 그 길의 의미를 호도하는 사례가 넘쳐난다. 예를 들어 12·12 쿠데타를 획책한 전두환과 그 일당도 5공화국이라는 군사독재의 길을 만들었다. 몇몇 무리가 국정을 농단하고 자신들만의 길로 대한민국이라는 배를 내몰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길은 세상에 없던 길이 아니라 이전 독재체제의 길을 베꼈다. 비근하게 교과서에서 배우는, 고려 무신정권이 벌인 정변의 연속 또한 그들의 상관이 벌인 기만과 배신을 답습했다. 따라서 그 길은 루쉰이 말한 길이 아닌 그들이 구사하는 교활한 기만술의 연속을 의미한다. 거짓을 반복하는 패러디적 수행이 아닌 진정한 수행의 길은 자신을 불사르며 신념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고행의 여정이다.

다큐멘터리 '길위에 김대중'은 길 위에 민주주의로서 은유가 아닌 직유다. 인간 김대중처럼, 투사 김대중같이 투쟁하고 쟁취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지금 민주주의는 길 위에 놓여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선택의 순간에 서있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염원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표현해야 할 강력한 의지에 달려있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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