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류석호 칼럼] 인도와 한국 번영 이끈 양국 國父의 교육혁명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2.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403010002229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04. 03. 18:10

2024013101003359500185931
칼럼니스트, 전 조선일보 영국특파원
인도의 저력과 약진은 놀랍다. 지난해 8월 23일 인도가 무인 달 탐사선 찬드라얀 3호를 세계 최초로 달 남극에 안착시키는 데 성공한 지 10일 만에 첫 태양 관측용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 인도인의 자신감을 크게 끌어올린 쾌거다.

지난해 9월 열흘간 인도를 여행하면서 인도의 발전상과 인도인의 자부심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인도의 우주개발 시작은 보잘것없었다. 어촌의 한 작은 성당이 인도의 첫 우주기지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고작 81달러였던 신생 독립국가가 1962년 인도우주위원회를 만들었다.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도 '인도 우주개발의 아버지' 비크람 사라바이 박사를 발탁, 그에게 전권을 실어준 인물이 인도의 초대 총리(1947~1964) 자와할랄 네루다. 네루 총리는 우주개발이 인도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예견, 신생 독립국 처지에서 국민을 먹여 살리기도 힘든 시기에 우주에 일찌감치 눈을 돌렸다.

특히 인도의 높은 학구열은 큰 자산이다. 인도공과대학(IIT, 전국에 23개)의 실력은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공대평가 세계 3위), 인도 학생들은 의대보다 공대 컴퓨터공학, 전자·전기 공학과 등을 더 선호한다고 한다.
IIT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업가, 기업가, 교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을 배출했으며 인도를 정보기술(IT) 강국으로 이끄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미국 실리콘밸리 창업자의 15~20%, 나사(NASA, 항공우주국) 직원의 30%가 인도공과대 출신이다.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인도의 국부(國父) 네루 초대 총리가 인도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IIT 설립을 주도했다. "인도가 국제사회에서 역할을 하려면 선진 기술에서 뒤져선 안 된다." 그의 통찰력은 적중했다. 이런 분위기가 인도의 IT기술 및 우주과학 기술을 끌어올린 디딤돌이 됐다.

대한민국 국부 이승만 대통령(1948~1960)의 교육혁명은 어떤가. 우리의 건국 대통령에게 '교육'은 평생을 관통한 화두였다. 국민이 까막눈에서 벗어나 생활방식을 개혁하고 글을 배워야 강대국의 밥이 되지 않는다는 지론을 초지일관 견지했다.

건국 대통령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일찍이 20대 한성감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청년 이승만이 '제국신문'에 기고한 글을 발췌하면, 1901년 5월 10일 "나라 구제는 교육으로", 1902년 10월 28일 "교육이 아니면 나라와 백성이 흥왕발달할 수 없으니 교육이 제일 급하다" 등 교육에 관한 것이 아주 많다.

이승만이 미국 하와이에 한동안 정착하게 된 것은 사탕수수 노동자 이민으로 인한 한인학교 때문이었다. 그는 한인학교를 시작하며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남녀공학 학교를 세웠다. 1914년 하와이에 한국 최초의 남녀공학 학교인 한인기독학원을 설립하고 기숙사까지 갖췄다.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 대통령의 교육에 대한 집념은 전쟁 중에도 학교 수업은 멈추지 못하게 했다. 이승만은 교육은 부모도 간섭할 수 없는 국민의 권리로 규정했다. 그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에도 정부예산의 20%가 교육예산이었다.

1952년 12월에는 하와이 교민들이 보내온 성금으로 "한국의 MIT를 세우겠다"며 인천에 인천과 하와이의 앞글자를 따서 인하공과대학을 설립했다. 특히 전시 중 대학생들은 입대하지 않는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특별조치로 인재를 보호했다.

이승만은 학교는 물론 전국의 마을과 공동체에서 문맹 퇴치와 성인 교육을 위한 집회를 개최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글자를 가르치는 교육을 했다. 그 결과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80%를 넘었던 문맹률은 그가 물러날 때 20% 이하로 떨어졌다. 또한 2만명의 인재를 선발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냈다.

대한민국 경제기적의 동인(動因) 중 하나는 우수한 인재라는 게 국내외 석학들의 공통된 평가다. 국부 이승만이 남긴 인재가 산업화 시대의 중추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국가들 중 우리나라만큼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선진화로 빨리 발전한 나라는 없다.

산업인프라가 빈약하고 부존자원이 없는 최빈국에다 전쟁의 참화까지 겪은 나라가 이런 성취를 이룩한 바탕은 교육을 통한 인적자본의 힘이 절대적이었다는 게 국내외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기본은 교육입국(敎育立國), 교육혁명(敎育革命)이었다.

우리 원자력 산업 평론가들은 1956년을 '한국 원자력의 원년(元年)'으로 삼는다. 대통령 이승만은 해외 석학의 조언을 듣고 1인당 국민소득이 41달러로 한국 국민 대다수가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를 받아 끼니를 해결하던 시절, 236명의 젊은 과학도를 1인당 6000달러를 들여 미국, 영국, 캐나다 등지로 원자력 해외연수를 보냈다. 이승만은 원자력연구소를 세우고 35만 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연구용 원자로를 만들게 했다. 이승만은 팔순의 나이에 생애를 초월한 20년 뒤의 한국을 부흥시키는 원자력을 선택한 것이다.

아무튼 인도는 현재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5위로 한때 자신들을 통치했던 영국을 앞질렀다. 한국 또한 지난 1월 발표된 2024년 IMF(국제통화기금) 전망에 따르면, 1인당 GDP가 3만4653달러로 과거 식민 지배를 당했던 일본(3만4554달러)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된다. IMF가 한국이 일본의 1인당 GDP를 뛰어넘는 전망치를 내놓은 것은 처음이다.

인도와 한국 두 나라가 모두 국부의 선견지명과 탁월한 리더십 덕분에 교육혁명을 통해 크게 일어선 모범사례라고 봐야 할 것이다.

류석호 칼럼니스트, 전 조선일보 영국특파원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