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강성학 칼럼] 자유(Freedom)의 본질은 무엇일까?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2.asiatoday.co.kr/kn/view.php?key=20231025010013929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3. 10. 25. 17:57

강성학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미국의 남북 간 내전은 대부분의 전쟁보다도 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를 위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은 자유의 철학적 이해를 어렵게 만들고 또 자유의 정치적 실현에서 항상 무엇인가가 미진하게 남는 것으로 보이는 딜레마의 본질들을 명확하게 해주었다.

링컨 대통령은 전쟁 수행 중인 1864년 4월 18일에 행한 연설에서 세계는 자유라는 말에 관한 하나의 좋은 정의(definition)를 결코 갖지 못했다면서 자유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우리 모두가 자유를 위해 선언하지만 그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모두가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서 "누군가에게는 자유라는 말은 각자가 자신과 자기 노동의 생산물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타인들과 타인들의 노동의 생산물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고 했다.

자유라는 동일한 말로 불리지만 서로 상이할 뿐 아니라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 이것들 각각은 서로 다른 정당들에 의해서 자유와 폭정이라는 두 개의 상이하고 양립할 수 없는 이름으로 불린다. 링컨의 설명은 이렇다.

"목동은 늑대를 양의 목으로부터 쫓아내고 양은 목동을 해방자로서 감사하는 반면에 늑대는 동일한 행동에 대해 목동을 자유의 파괴자라고 비난한다. 분명히 양과 늑대는 자유라는 말의 정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확하게 동일한 차이가 오늘날 인간들 사이에서 지배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속박의 굴레에서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떤 사람들은 자유의 진전이라고 환영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모든 자유의 파괴라고 통탄한다." 자유는 이처럼 야누스처럼 두 얼굴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정치적 자유란 우리가 정치 권력자의 소유자 아니면 정치권력의 대상에 관해 생각하는지의 여부에 따라서 두 개의 상이하고 양립할 수 없는 의미를 갖는다. 정치권력의 장악자를 위한 자유는 정치적 지배를 행사할 기회를 의미한다. 반면 그 권력행사의 대상을 위한 자유는 그런 지배의 부재를 의미한다.

자유에 대한 이 두 개의 개념은 논리적으로 상호배타적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공존이 불가능하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대가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하나가 많아질수록 다른 하나는 그만큼 적어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유의 개념은 정치적 주인과 그의 대상의 관점에서 볼 때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것은 사회의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단지 이쪽인가 아니면 저쪽인가, 주인인가 대상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에 있어서 모호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정치권력의 대상이 되게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그것에 대상이 됨으로써 정치권력에 관하여 이중적 역할을 수행한다.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 자유를 주장할 때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자유인가 아니면 타인들의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가? 어쩌면 사람들은 전자를, 아니면 후자를 의미한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둘 다 의미한다.

이런 모호성이 지배로부터 해방의 관점에서 지배할 자유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전형적으로 이데올로기들로 표방하기 때문에 계속적인 혼란을 필연적으로 일으킨다. 그러므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자유란 용어상 모순이다. 정치적인 영역에서 한 사람의 자유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자유의 결핍에 의해 지불된다. 정치적 주인은 자기 권력의 대상인 사람들의 자유의 대가로만 자기의 자유를 갖게 된다. 그리고 후자는 오직 주인이 자기의 자유를 희생하게 될 때에만 자유로울 수 있다.

정치권력에 대한 자유에 적용되는 것은 동시에 정치권력의 행사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진리의 표현과 적용에서 자체를 노출한다. 정치적 문제에서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진리를 표방하는 데 자유롭지만 그의 생각과 행동을 부패시킬 실수의 자유는 결국 승리할 진리(the truth)의 자유와 양립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다른 진리들의 수락을 위해서 시장에서 다른 진리들과 경쟁하는 많은 진리들의 자유는 자기의 진리에 대한 개념을 모두에게 강요하는 사람의 자유를 폐기하는 것이 요구된다. 어떤 주어진 사회에서 모두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자유로울 수는 없다. 모든 사회는 어떤 자유를 갖게 될지를 스스로 결정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특정된 역사의 특정된 시기에 특정된 사회가 실현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자유란 사회가 살고 있는 정치적 질서의 종류에 달려있다. 그리고 특정된 질서의 성격은 그 사회가 스스로 표방하고 그것이 정치의 매개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요컨대 한 사회가 향유하는 그런 종류의 자유란 그것이 추구하는 정치적 정의 성격에 의해서 결정된다. 자유는 정의 없이 정의(define)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특수한 정의감에 의해 형성된 특수한 정치적 질서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전 인류역사를 통해 자유를 실현하려는 모든 시도는 두 개의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정의의 개념 중의 하나에서 기인했다. 하나는 소수주의 혹은 엘리트주의이고 또 다른 하나는 평등주의 혹은 대중주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근대의 귀족주의와 전체주의 정부의 정당화에 이르기까지 다수를 위한 정치적 자유의 거부는 소수에게 자유를 향유할 능력과 권리를 제한하는 정치적 정의의 개념에 기인한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성뿐만 아니라 자유가 역사의 강제력이라는 헤겔의 철학을 거부했다. 마르크스는 자유를 오직 부르주아의 자유와 동일시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재산뿐만 아니라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폐지하려 든다. 그렇다고 "공산당 선언"이 프롤레타리아의 자유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공산주의 이론은 정보의 독점과 통신의 매스미디어에 대한 통제가 언론의 자유라고 뻔뻔스럽게 주장한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공산주의 개념과 정치적 자유를 소수에게만 유보하는 모든 정치적 철학들에 반대하는 결정적인 주장은 두 날개의 반론에 의존한다.

하나의 날개는 합리적 존재로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어느 정도의 정치적 진리에 접근성을 가지고 있다는 다원주의적 가정이다. 또 하나의 날개는 소수자들이 정치적으로 지혜롭기에 필연적으로 정치적 선(good)도 독점할 수 있다는 명시적 가정에 반대한다. 어떤 소수도 그것이 절대적 지혜를 갖고 있다는 가정에서 절대적 권력의 위임을 받을 수 없다. 칸트에 의하면 플라톤의 철인왕도 믿을 수 없다. 영국의 액튼(Acton) 경의 주장처럼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 이런 주장은 인간의 본성에 근거한다.

따라서 정기적인 선거가 권력자에 대한 제한을 가한다. 그 선거가 통치자들을 선택하고 그들을 통해 정책들을 선택할 자유를 제공한다. 그런 자유를 잃은 민주주의는 권력자와 그의 정책을 승인하는 국민투표라는 요식행위로만 살아남을 것이다. 그럴 경우 그것은 이미 민주주의의 탈을 쓴 전체주의일 것이다. "자유인이여, 경계하라!"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