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언론에 경종 울린 장두원 아투 상임고문 아름다운 퇴임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2.asiatoday.co.kr/kn/view.php?key=20230810010005708

글자크기

닫기

이욱재 기자

승인 : 2023. 08. 10. 16:05

장두원 아시아투데이 고문 인터뷰
장두원 아시아투데이 상임고문./송의주 기자
"국가관 결여, 노사문제, 사회갈등, 지역감정 등 우리가 처한 혼돈의 세계가 아무리 극에 달해도 언론과 교육이 올바로 서 있다면 국가의 내일은 밝을 것이다"

장두원 아시아투데이 상임고문(85)은 아시아투데이 창간 이후 15년 역사를 함께한 장본인이다. 8월로 상임고문직의 소임을 마치고 퇴임하는 장 고문은 한국 언론 발전을 위해 후배들에게 여러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언론이 늘 사회의 어두운 곳을 밝혀주는 등불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으로 따금하지만 귀감이 될 만한 소중한 충고들이다.

장 고문은 실제로 '촌지 받지 않기 운동' 등을 이어가며 언론계의 큰 어른으로 언론계 자정을 위해 등불로 역할을 도맡아 왔다. 과거 '언론 그 일그러진 자화상'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내며 언론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아시아투데이와 인연을 맺기 직전까지 KBS 보도본부 주간을 지냈던 장 고문은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실물을 국내 언론 최초로 보도한 것을 비롯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베일에 쌓였던 백담사 생활을 담은 사진 보도, 1980년 5·18 당시 광주 상황을 국내 언론 최초로 보도한 주인공이다.
사명감 하나로 80평생을 살아온 그는 어느덧 머리에 새하얀 서리가 내린 백발 노기자가 됐다. 굴곡의 한국 현대사의 한복판을 용기와 소신 하나로 묵묵히 지켰던 그가 기자의 길을 뒤로하고 이제 아름다운 퇴임을 앞두고 있다.

◇다음은 장두원 고문과의 일문일답

-반백년 이상을 늘 바르고 자랑스러운 언론인으로 생활하셨다. 후배 언론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언론사와 기자들이 과거 스스로 입신양명을 위해 살아가는 일들을 목격했다. 언론인은 당당하고 정직해야 한다. 언론인의 정신적 개조 없이는 우리의 앞날은 요원하다. 항상 정의롭고 사심이 없어야 한다. 모든 기사를 쓸 때 그것을 꼭 생각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방송사 재직 시절 전주방송 총국장을 역임하면서 '촌지 받지 않기 운동' 등 언론 정화운동을 주도하셨는데

전북 총국장으로 갔을 때 도지사가 절절매고 있길래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기자들이 돈을 안 줘서 공격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기자들이 촌지를 받지 못하도록 운동을 벌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자들이 식사 제의를 해 와도 3개월을 같이 식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후배들을 향해 "월급이 얼마인데, 뭐가 부족해서 그러느냐. 그렇게 촌지 받는 기자들은 상대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다. 이후 후배들에게 들으니 당시 도지사와 기관장들의 만찬 자리에서 다른 언론사 기자들은 다 촌지를 받는데, 장 총국장 소속사 기자들만 촌지를 받지 않는다는 얘길 들었다. 그래서 효과가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고문님의 자서전 '언론, 그 일그러진 자화상'은 언론계에 대한 자기고백서라는 부제가 붙었다. 소개 부탁드린다.

나라가 잘되려면 언론과 교육자들의 표상이 건전하게 확립되어야 한다.

국가관 결여, 노사문제, 사회갈등, 경제부조리, 지역감정 등 우리가 처해 있는 혼돈의 세계가 아무리 극에 달해도 언론과 교육이 올바로 서 있다면 민족과 국가의 내일은 가나안의 땅처럼 약속받을 수 있다고 본다.
촌지문화란 부끄럽고 선배 언론인들을 대하기도 민망스럽다.

-현역 기자시절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셨는데 특히 문화부에서도 큰 특종을 했다고 들었다.

1991년 남북한과 일본, 중국 4개국이 3~4세기 고구려 역사 연구를 위한 학술회의를 중국에서 열었다. 당시 한·중 수교 이전인 상태여서 양국이 상당히 냉랭한 상황에서 세미나가 열렸던 때다.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 고분으로 답사를 갈 기회가 있었다. 당시 중국 안내인은 카메라는 모두 휴대할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구속돼 귀국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당시 문화부장이었던 나는 선조의 발자취를 조국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옷 속에 카메라를 감추고 갔다. 안내원이 잠시 뭐를 가지러 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고분 내부로 들어가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 사진 중 하나가 고구려 고분벽화로 잘 알려진 '무용총'이다. 이 고분이 생긴 1600년 이래 한민족으로서는 최초로 찍은 사진이었고, 이 일로 보도 특종을 거머쥘 수 있었다. 흔히 알려진 교과서 속 무용총 사진은 일제 때 일본인이 찍은 사진이다.

보도 이후 국내 유명 사학자로부터 몰래 찍은 사진이라고 항의를 받기도 했지만, 후에 이 사진의 가치를 인정받아 당시에는 '보도 의미를 몰랐다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기도 했다.

장두원 아시아투데이 고문 인터뷰
-역대 대통령들과 관련해서도 여러 특종을 하셨다고 들었다. 그중 하나를 소개해 주신다면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기억난다. 때는 KBS에서 해직된 뒤 8년여 만에 복직돼 정치부장대우로 있던 1989년 겨울이다.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 집권 시절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백담사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그의 근황이 국내 언론은 물론 세계에서도 관심사였으나, 백담사 근교는 수많은 경찰병력이 지키고 있어 접근이 불가능했다. 아무도 그의 근황을 알 길이 없었다.

취재단장이었던 나는 대청봉을 넘어 중청, 소청봉을 지나는 코스로 백담사에 접근할 수 있었다. 전 전 대통령의 '입'으로 불리는 민정기 비서관을 만나 백담사 생활을 담은 사진 100여 장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이 중 10여 장의 사진을 가지고 복귀해 전 전 대통령 은둔 100여 일 만에 최초로 보도할 수 있었다. 승복을 입은 전두환·이순자 부부의 생활이 처음 알려진 것이다.

이후에도 다시 백담사를 찾아 전 전 대통령 부부를 찾아뵙고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백담사로 가는 길은 당시도 험난했다. 백담사에 음식과 물을 대어주는 보살님에 부탁을 했다. 보살님이 나를 인척이라고 소개해 그러한 도움으로 경찰경비소를 통과할 수 있었다. 당시 이순자 여사는 동행한 나의 아들을 등에 업고 마당을 돌아다녔다. 서울에 두고 온 손주들이 눈에 밟혀 그립다고도 했다.

이러한 인연이 닿아 전 전 대통령 측근 인사로부터 정치 입문을 제안받기도 했지만, 결국 나는 사양했다.

-언론 검열이 있던 당시 5·18 광주 상황을 공영방송인 KBS에서 최초 보도를 내보낸 주인공이신데

나는 5·18 당시 KBS 서울 본사에서 TV뉴스 담당 편집부 차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는 보안사령부 소속 대령이 광주에 관한 건을 보도하면 즉결처분한다고 언론에 엄포를 놓던 때였다.

나는 KBS 담당 보안사 담당자를 만난 자리에서 "광주 관련 외신이 들어온 게 있는데 언제 보도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죽고 싶으면 보도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미 결심이 선 나는 보도국장의 방을 찾았고, "보도 허가가 떨어졌습니다"라고 거짓 보고를 했다. 이에 보도국장은 즉시 보도를 지시했고, 이미 준비된 원고를 아나운서에게 전달해 보도하도록 했다. 저녁 9시 뉴스와 달리 내가 담당했던 저녁 7시 뉴스는 짧은 기사 위주로 나가 감시의 눈이 적었다. 담당부서 데스크, 편집부, 교정부, 편집국장의 손을 거치는 신문사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인간적인 두려움은 없었나

광주에 직접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AP통신 등 외신들도 한국에 왔던 터라 광주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5·18 사흘 뒤인 5월 21일 아내에게 "내가 오늘은 못 들어 올지도 모르겠다"면서 출근했다. 그때는 정말 굳은 결심을 하고 회사로 향했다.

-KBS 최초 보도 뒤 상황은 ?

이 보도 이후 약 한 시간이 조금 지나 각 신문사가 호외를 거리에 뿌렸다. KBS 보안부 담당자는 그날로 해직됐고, 나도 그해 7월 130여명의 KBS직원들과 함께 해직 당했다.

-이후 보도본부 주간까지 역임했는데, 해직 뒤 복직 과정이 순탄치 않았을 것 같다.

노태우정부가 들어서면서 언론인들과 공직자들에 대한 복직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80년 해직자복직보상법'이 국회에 제출되는데,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총재, 김종필 총재 모두 이 법안에 찬성했지만, 김대중 총재(DJ)의 평화민주당이 이를 반대했다. 해직자 중 기자들뿐만 아니라 소수지만 정치 사찰 형사, 안기부 직원 등이 있다는 이유였다.

이때부터 DJ와의 인연이 본격적으로 깊어졌다. 정치부 기자 생활을 하며 DJ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해직기자들을 대표해 면담을 요청했다. DJ가 수락해 여의도 당사에서 만남이 이뤄졌다. 그 자리에서 DJ에게 "바다 같은 정치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바다는 장마철의 흙탕물도, 오염된 폐수도 모두 받아들여 정화시킨다. 사찰 형사, 안기부 직원에 흔들리지 말고 군부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해직기자들의 처지를 이해해 달라는 것이 내 주장의 요지였다. 묵묵히 나의 요청을 듣던 DJ는 그 자리에서 법안 통과를 약속했고, 평민당은 곧바로 당론으로 찬성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후에도 DJ와의 인연은 이어졌고, 수년 간 DJ 장남 김홍일씨를 통해 정책 제의를 전달하기도 했다.

-명예회복 과정은 순탄했나

복직을 위한 소송 절차도 밟았다. 당시 KBS 뉴스를 녹화해두지 않아 증거가 없어 정부로부터 내가 강제 해직됐는지 여부가 증명되지 못했다. 결국 재판에서 지고 포기를 하던 찰나 국방부의 '신군부 언론통제 사건' 조사결과 보고서가 2007년 공개됐고 2010년 민주화 심의위원회가 이를 공식 인정하면서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국방부 보고서에는 나의 해직 사유가 '반정부(反政府)'로 기록돼 있었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나라가 잘되려면 선생과 언론인의 정신이 바로 서야 한다. 선생님은 요람에서 일정기간 지식 교육과 훈육을 통해 청소년을 동량으로 키워낸다. 언론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무덤에 이르기까지 지도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 말을 꼭 강조하고 싶다.

◇장두원 아시아투데이 상임고문
장두원 아시아투데이 상임고문은 1938년 전북 전주시 출생으로 한양대학고 원자핵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한신문 기자로 입사해 언론인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한국방송공사(KBS)로 이직해 KBS 정치부장과 문화부장, 전주방송총국 국장, 보도본부 주간 등을 역임했다. 당시 '촌지 받지 않기 운동' 등을 이어가며 언론정화 활동에 힘썼다. 아시아투데이에서는 논설주간, 주필, 부회장 등을 맡았다.
이욱재 기자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