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6·25 64주년 기획] ‘아름다운 전쟁영웅’ 김영옥 대령은 누구?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2.asiatoday.co.kr/kn/view.php?key=20140617010009921

글자크기

닫기

김종원 기자

승인 : 2014. 06. 18. 05:00

2차 세계대전·한국전쟁 '전설적 영웅' 미군 최초 유색인 대대장 '전쟁 고아의 아버지'
김영옥 대령2
한인 전쟁영웅 고 김영옥 미 육군 대령은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한국전쟁에 18개월 동안 참전해 38선이 북쪽으로 60km 북상시키는데 주역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김 대령은 미 7사단 31연대 1대대 소속으로 51년 겨울부터 서울 삼각지에 있는 고아원 경천애인사를 지정해 재정 지원을 시작했다. 한국을 떠난 이후에도 김 대령은 수년간 계속 지원했으며 경천애인사에는 많게는 500여명의 고아들이 있었으며 훗날 목사, 예술가, 사업가, 교수 등으로 자랐다. / 사진=한우성 재미언론인
“나는 인간이란 존재의 속성상, 그래도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되도록 단기간 안에 끝내야 한다고 믿는다. 전쟁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이 전쟁을 모른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하나뿐인 소원이다.”

한국인으로서 ‘불멸의 전쟁 영웅’ ‘아름다운 전쟁 영웅’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김영옥 예비역 미국 육군 대령(2005년 12월 작고)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으로 20여개의 훈장과 표창장을 받았지만 사회적 소수 약자에 대한 삶으로 진정한 ‘우리시대 영웅’으로 다시 조명받고 있다.

김 대령은 1910년대 미국 이민 1세대 가족인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 김순권 씨와 유학생이었던 어머니 노라 고 사이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1919년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미 육군 병사로 징집돼 장교후보생에 선발돼 소위로 이탈리아·프랑스 전선에 참전해 전설적 전쟁 영웅으로 로마·피사 해방의 주역이 됐다. 재미 일본인 2세들로 이뤄진 442연대 100대대 지휘관으로 일본인들을 이끌고 ‘총알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휘관’으로 일본인에까지 한국인의 기개를 심어줬다.
미국 언론이 그를 전쟁 영웅으로 대서 특필했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미군 내 인종차별로 전후 전역해 성공적인 사업가로 변신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류상의 조국이 아닌 진짜 내 나라,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다시 군복을 입고 자원 입대 참전했다.

김영옥 대령1
김영옥 중위가 1944년 2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에서 마크 클라크 미군 5군사령관으로부터 은성무공훈장을 받고 있다.독일군 전차부대와 맞서 싸운 김 중위의 활약상은 미국 언론에까지 대서 특필됐다. 왼쪽 아래 작은 사진은 김 중위에게 훈장을 달아줬던 클라크 대장(왼쪽에서 두번째 앉은 이)이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사령관으로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 사진=한우성 재미언론인
유엔군의 3차 반격 때 중상까지 입으면서 38선 중부전선을 60km나 북상시킨 전쟁 영웅으로 전장 중에 미국 역사상 유색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대대장 지휘관으로 특진했다.

한국전쟁 중 서울 삼각지에 있는 경천애인사 고아원을 통해 500여명의 전쟁 고아를 지원한 ‘전쟁 고아의 아버지’로서 전후에도 미국으로 입양된 고아들을 돌봤다. 한국군 군사고문으로 전시동원계획 개편과 한국군 최초 미사일 부대 창설에도 기여했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로 별을 달지 못하고 대령으로 군복을 벗은 그는 예편 이후에도 전쟁 영웅을 뛰어넘어 미국 역사를 바꾼 소수계의 권익을 신장시킨 사회봉사활동가로 헌신했다. 한인 전쟁영웅이며 미국 사회에서 여성과 아동, 청소년, 노인, 장애인, 빈민, 소수계 등 사회적 약자 편에서 권익을 획기적으로 신장시켰다.

소수계 청소년을 돕는 비영리단체와 한인청소년회관 출범을 주도했으며 빈민구제기관을 창립 이사장을 지냈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과 그 자녀들을 위한 보호소 설립, 일미박물관과 한미연합회, 미 최대 소수계 비영리 보건기관인 한인건강정보센터까지 창립했다.

미 국방부의 노근리사건진상조사위원과 함께 일본계 미군 장병 2차대전 참전용사회 회장을 맡아 한·일, 한·미 관계 증진에도 크게 기여했다.

2010년에는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주립대에 한국 정부와 재미 한인사회가 협력해 재미한인연구소를 설립하면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학기구에 한국인 이름을 딴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라고 명명했다. 한국으로서는 1948년 정부수립 이래 국제무대에 세운 최초의 해외동포연구소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함께 참전했던 노병들은 “김영옥은 항상 가장 선봉에서 총알이 날아오는데도 피하지 않고 부하들에게 결코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휘관이었다”면서 “장교로서, 지휘관으로서, 리더로서, 군인으로서 늘 부하들과 생사를 최일선에서 함께 했으며 전쟁 영웅으로 이름을 남기기 보다는 모든 것을 걸고 전쟁을 없애고 싶어했다”고 기억했다.

그가 받은 주요 훈장만 해도 한국 정부로부터 최고훈장인 태극무공훈장과 국민훈장 모란장, 한국방송(KBS) 해외동포상, 미국 정부로부터 특별무공훈장, 은성무공훈장 2개, 리전 오브 메릿 2개, 동성무공훈장 2개, 퍼플 하트 3개를 받았다. 프랑스 최고훈장인 레지옹 도뇌르와 이탈리아 십자무공훈장·동성무공훈장 등 모두 20여개의 훈장·표창장을 받았다.
김종원 기자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