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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LG 키운 힘은 ‘도전’…구인회부터 구광모까지 ‘미래’ 향했다

⑤LG 키운 힘은 ‘도전’…구인회부터 구광모까지 ‘미래’ 향했다

기사승인 2020. 08. 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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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LG, 구광모의 승부수!]
창업주 포목사업 첫 실패에 "더 멀리 보자"
사업 안주 않고 전자산업 뛰어들어
배터리·OLED도 포기 모르는 집념 원동력
구광모, 100년 LG 향한 로봇·AI 새먹거리 발굴
100년 LG 구광모의 승부수
“초반에 일이 잘 안된다고 주저앉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무슨 일이든 10년은 해봐야 결판이 나지 않겠느냐?”

25세 나이에 자본금 3800원으로 경남 진주 중앙시장에서 포목 사업에 뛰어든 청년 구인회는 사업 첫해인 1931년 큰 실패를 맛봤다. 손실 규모만 500원으로, 당시 쌀 100가마에 달했다. 대량으로 유통하는 기존 포목점을 작은 규모의 ‘구인회 상점’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부친인 구재서는 실패를 나무라기는커녕 더 멀리 내다보고 도전할 것을 당부했다.

사업은 이후로도 순탄치 않았다. 장마로 포목이 물에 잠기는가 하면 홍수로 아예 가게가 떠내려가기도 했다. 가혹한 시련 속에서도 구인회는 좌절하지 않았고 발품을 팔아가며 고객 취향에 맞는 제품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고객들이 원하는 다양한 질감과 무늬의 옷감 등 ‘구인회상점’에서만 구할 수 있는 제품을 늘려가며 진주 일대에서 내로라하는 포목점으로 성장시켰고, 이후 부산으로 무대를 옮겨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을 설립했다.

작은 포목점을 운영하며 몸에 익힌 ‘고객경영’과 ‘단기성과에 급급하지 않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다’는 창업주의 신념이 구자경 회장과 구본무 회장을 거쳐 4대인 구광모 회장으로 이어오며 오늘날 매출 160조원, 국내외 임직원수 25만명의 재계 4위 LG그룹의 근본적인 토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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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회장부터 이어진 ‘실패 두려워 않는 도전’ DNA
5일 재계에 따르면, LG화학이 올해 2분기 전기차 배터리 부문에서 1555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두며 흑자전환에 성공하자 고 구본무 전 LG그룹 회장의 과감한 투자와 포기할 줄 모르는 집념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구본무 회장은 1992년 유럽 출장 중 들른 영국 원자력연구원(AEA)에서 충전만 하면 여러 번 쓸 수 있는 2차 전지를 처음 접한 뒤 미래 성장 동력으로 점찍었다. 직접 샘플까지 챙겨 와 당시 계열사인 럭키금속에 연구를 지시했지만 성과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일본 업체들을 따라잡기에는 품질과 기술력의 차이가 너무 컸다. 10년이 지나도록 눈에 띄는 결과가 없었고, 2005년엔 2000억원의 적자를 내자 그룹 내에서도 사업을 접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구 회장은 그때마다 “2차 전지에 우리의 미래에 달렸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너의 결단이 없었다면 LG화학 배터리의 흑자 전환은 상상하기 힘들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전기차 배터리 사례처럼 올해로 73주년을 맞은 LG그룹의 성장 역사는 오너들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정신과 궤를 함께한다. 엄격한 유교집안의 반대를 딛고 장사에 나섰다가 첫 실패를 맛본 창업주 연암 구인회 회장의 값진 경험이 LG 성장의 자양분이 된 셈이다.

국산 화장품인 ‘럭키크림’부터 치약, 라디오, 흑백TV 등 LG가 무수히 많은 ‘국내 최초’ 수식어를 만들어 낸 것도 고객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고 남이 하지 않은 일을 찾아 먼저 도전한 구인회 회장의 경영철학과 맞닿아 있다. 럭키크림 뚜껑이 파손되는 일이 잦자 플라스틱에 눈을 돌렸는가 하면, 외국산 콜게이트 치약이 시장을 장악하던 때에는 “버터 먹는 미국사람 치약하고 김치 먹는 한국사람 치약은 달라야 한다”며 국내 최초 치약을 제조해 시장에 뛰어들기도 했다.

1958년 금성사(현 LG전자)를 출범시키며 국내 기업으로 처음 전자공업에 뛰어든 것 역시 모험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당시 락희화학이 플라스틱 사업으로 적지 않은 수익을 올리고 있었지만, 향후 군소업자와 출혈경쟁이 불가피하고 기술집약적 업종 개발이 어렵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맞수 삼성전자의 전신인 삼성전자공업 설립보다도 11년이나 앞선 일이었다.

금성사는 설립 1년 만에 ‘골드스타’ 상표를 부착한 최초의 국산 라디오 A501 제품을 내놓았는데, 라디오 사업 준비 당시 내부 임직원들조차 회의적인 시각이 팽배했다. 미군 PX에서 하루 수백대씩 라디오가 흘러나오고 있는 판국에 생판 모르는 분야에 뛰어들어서는 경쟁이 안 된다고 했지만 연암의 결단은 단호했다. 시행착오 끝에 나온 라디오는 소비자들의 외산 선호로 인해 난항을 거듭했지만, 밀수품 단속이 강화되고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전개되면서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금성사는 이후 선풍기, 흑백TV, 냉장고, 에어컨 등 주요 가전제품들의 최초 국산화를 이끌면서 국민생활의 모습을 바꿔나갔다. “남이 안 하는 일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되, 어디까지나 국민경제에 유익하고 이익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구인회 회장의 소비자 편익과 고객 정신이 빛을 발한 셈이다. 플라스틱으로 대표되는 화학산업과 전자산업 개척으로 한국 산업근대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삼성보다 앞선 전자산업 진출…라디오·컬러TV 등 ‘승부수’
부친인 구인회 회장의 창업부터 성장을 함께 일궈 온 구자경 회장은 진주사범학교를 마치고 5년간 교사로 근무하다가 1950년부터 20년간 생산현장을 지킨 ‘현장 전문가’다. 락희화학 이사로 입사했지만 기름때 묻은 허름한 야전점퍼를 입고 공장 근로자들과 먹고 자며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재계에서는 한국 2세 경영인 가운데 구자경 회장만큼 현장을 잘 알고 기술을 잘 이해하는 경영인은 없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다.

회장 재임 시절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이라는 신념으로 첨단기술 개발과 내실경영으로 LG를 한단계 도약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공장 지킴이’로 불릴 만큼 오랜 현장 경험이 바탕이 됐다. 구자경 회장이 강력하게 추진한 기술 연구개발(R&D) 성과로 금성사가 카세트 녹음기(1973년) 19인치 컬러TV(1977년), 전자식 VCR(1981년), 프로젝션 TV(1983년) 등을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등 오늘날 ‘가전=LG’라는 인식이 자리 잡은 것도 이 시기다.

특히 컬러TV 생산은 일종의 사업 승부수나 다름없었다. 컬러TV 생산은 1975년 구미공단에 연산 50만대의 생산공장이 준공되면서 본격화됐는데, 당시 컬러TV는 국내 컬러방송 시기가 확정되지 않아 국내 시판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해외 수출로 눈을 돌려 전량을 미국 수출용으로 먼저 생산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수출에서 가전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높아졌다. 글로벌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해외 시장에 진출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이 주효한 것이다.

이는 해외 진출에 속도를 내는 계기가 됐다. 구자경 회장 재임 기간 당시 럭키그룹은 50여 개의 해외 법인을 설립했고, 1982년 미국 앨라바마주 헌츠빌에 컬러TV 생산공장을 세웠다. 국내 기업 최초의 해외 생산기지였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금성사 헌츠빌 공장 설립에 대해 “한국의 기업이 이제 미국 사회에서도 성공적으로 뿌리내리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고,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도 성공적인 해외 진출 케이스로 헌츠빌 공장을 연구하기도 했다.

◇시행착오 끝에 전기차 배터리·OLED 등 차세대 기술 확보 ‘끈기’
1995년 스스로 회장 자리에서 물러난 구자경 회장의 뒤를 이어 50세에 LG 3대 회장에 오른 구본무 회장은 ‘집념의 승부사’로 통한다. 특유의 끈기와 결단의 리더십 아래 전자·화학·통신 서비스의 3개 핵심 사업군을 구축해 ‘글로벌 LG’의 기틀을 만들었다. 특히 전기차용 배터리 등 자동차부품과 OLED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 에너지 등 신사업 육성과 미래 준비에 역량을 집중했다.

전기차 배터리와 함께 OLED TV 사업 역시 세계 최고를 향한 구본무 회장이 집념이 돋보인다. 구 회장은 2009년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각광받던 대형 OLED의 본격 개발에 나서도록 독려했다. OLED는 LCD와 달리 백라이트 없이 스스로 빛을 내 두께가 얇고 화질이 뛰어나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불린다. 당시 LG디스플레이는 9인치 이상 대형 LCD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31분기 연속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던 때였으나 머지 않은 미래에 후발 주자의 거센 추격을 예상했던 것이다.

당시 OLED TV 패널을 개발하던 세계 유수 업체들이 잇따라 생산을 포기했다. 양산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LG디스플레이 역시 첫 생산에서 수율이 0%가 나올 정도로 시행착오와 기술적 난관을 겪었다. 회사 내부에서도 “OLED로 TV는 불가능하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구 회장은 미래 기술 주도권 확보를 위해 과감한 투자에 나섰고, LG디스플레이는 마침내 2013년 세계 최초 55인치 OLED 패널 양산에 성공하며 시장을 놀라게 했다. 현재도 대형 OLED TV 패널 생산능력을 갖춘 곳은 LG디스플레이가 유일하다. OLED TV가 프리미엄 TV 시장의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2020년 OLED TV 판매량은 2018년보다 2배 이상 늘어난 520만대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부친인 구본무 회장이 신사업 육성에 힘을 쏟은 것처럼 2018년 취임한 구광모 회장의 눈도 ‘미래’를 향하고 있다. 비핵심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차세대 전기차 배터리, 로봇, 인공지능(AI), 자동차 전장 등 미래 먹거리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지난 6월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과 회동해 미래 전기차 배터리 기술에 대해 논의하며 관련 협업을 강화하는 모습이다. 재계에서는 구광모 회장이 취임 이후 확보한 실탄을 바탕으로 100년 LG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미래 먹거리 발굴에 속도를 낼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LG그룹의 올 1분기 현금 보유액도 약 16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관계자는 “구광모 회장이 새로운 시장 개척에 힘쓴 선대회장들처럼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한 기술개발과 투자를 지속하고 인수·합병에 나설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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