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칼럼]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과 최근의 파업

[칼럼]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과 최근의 파업

기사승인 2022. 12. 05. 18:13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김이석(논설심의실장)
논설심의실장
내년에 탄신 300주년을 맞는 애덤 스미스(1723~1790)는 《국부론》의 저자로 유명하다. 그는 《국부론》에서 당시 성행하던 중상주의적 사고방식, 즉 그 나라에 쌓이는 금의 수량을 최대화하는 것이 좋다는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진정한 국부는 그 나라에 축적된 금의 수량이 아니라 그 나라 국민이 쓰는 재화와 서비스이므로 진정한 국부를 최대화하기 위해 자유무역을 하라고 주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책에서 최근의 경제학 교과서에도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문구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고기와 술, 빵을 먹으며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업자, 빵집 주인이 관용을 베풀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이익을 중시했을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과 거래할 때 그들의 인간애가 아닌 자기애에 호소한다. 또한 우리가 필요한 것을 말하지 않고 그들에게 유리한 점을 말한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에게 국제적 명성을 안겨주고, 스미스 자신도 평생에 걸쳐 수정을 거듭하면서 애착을 가졌던 저서는 《도덕감정론》(Theory of Moral Sentiments)이었다. 얼마나 저자인 애덤 스미스가 그 책을 애지중지했는지, 생전에 묘비에 "《도덕감정론》의 저자, 여기에 잠들다"라고 새기기를 바랐을 정도였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러셀 로버츠는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에서 스미스는 이 책에서 남들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로부터 승인을 받는 삶을 추천하면서 그런 사랑을 받는 자격을 갖추기 위한 방법으로 신중, 정의, 선행을 추천했다고 봤다.

여기에서 '신중'이란 자기 자신을 돌보는 차원에서 무모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넘어 "건강과 돈, 평판 등 인생과 관련된 모든 것을 현명하고 진지하게 보살핀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의'란 "타인에게 피해, 혹은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선행'이란 남에게 선하게 대한다는 것인데 과연 무엇이 선행인지는 분명치 않다고 봤다. 정의가 문법처럼 분명한 반면, 선행이란 훌륭한 글처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이 가운데 사회의 유지에 가장 필요하다고 스미스가 강조한 것은 '정의'다. 그는 선행은 건물을 장식하는 데 불과하지만, 정의는 "모든 건물을 지탱해 주는 중추적 기둥"이라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개인들이 자유롭게 자기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의'의 틀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러셀 로버츠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소극적 미덕인 스미스의 '정의'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수천 년 전 유대 현인 힐렐의 말을 소개한다.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타인에게 하지 말라." 이 말을 듣고 놀라는 까닭은 바로 《논어》 「위령공」편에 나오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의'가 지켜지지 않으면 건물이 무너져 산산조각이 나듯 사회가 유지될 수 없고 문명도 꽃필 수 없다는 게 스미스의 지적이다.

또 애덤 스미스는 인간은 다소 헐렁한 규칙보다 매우 엄격한 규칙을 오히려 더 쉽게 지킨다고 설파했다. 담배를 아예 안 피우는 규칙이 하루에 담배 몇 개비만 피우도록 허용하는 규칙보다 지키기가 더 쉬운 것처럼 말이다.

이런 《도덕감정론》의 지혜를 지금의 화물연대 파업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면 이렇게 된다. 나의 자유가 소중하면, 남의 자유도 소중한 법이다. 파업을 하는 화물연대는 비노조원 혹은 다른 운전자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막아서는 안 된다. 또 파업에 대한 불법과 합법의 기준과 처벌이 단순 명쾌해야 더 잘 준수될 수 있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