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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마음, 詩로 읽고 寫眞으로 보다! <영조 5>

임금의 마음, 詩로 읽고 寫眞으로 보다! <영조 5>

기사승인 2022. 01. 23.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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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창덕궁 애련정 앞에 그려진 소나무 그림자.
5. 무제

屈曲似蒼龍 구절양장 휘어진 것이 용의 모습을 닮았고

壇前日月久 단 앞에서 오랜 세월 동안 홀로 서 있었다네

大枝本自三 큰 줄기에서 나온 가지는 본래 셋인데

小榦便成九 작은 가지가 세월을 넘어 아홉이 되었네

風雨乃能生 비바람에도 꼿꼿이 살아남았으니

雪霜豈畏有 눈서리가 무에 두려울 게 있으랴

尙而君子心 그대 군자의 마음 숭상하여

竟夕倚牕友 저녁 내내 창가에서 내 벗이 되었네


영조
눈으로 뒤덮인 창경궁 환경전 지붕과 소나무.
<해설>
18세기 조선의 정치는 붕당 간의 극한 대립으로 얼룩졌다. 붕당의 존립 자체를 두고 정치 관료들은 목숨을 내놓고 서로를 헐뜯으며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특히 서인들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면서 자신들의 정치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숙종에 이어 왕위에 오를 두 왕자를 두고 치열하게 싸웠다.
거대한 소용돌이 중심에는 숙종의 장자인 경종과 그의 이복동생인 연잉군(훗날 영조)이 있었다. 우선 경종은 어머니 장희빈을 밀어주었던 남인과 소론의 지지를 받았고, 영조는 남인의 대척점에 있던 노론의 지지를 받았다. 경종은 후궁에서 왕후가 된 장희빈의 아들이었지만, 어머니가 사약을 받아 죽음으로써 정치적 약점이 있었고, 영조는 어머니가 궁녀 출신이라 열등감이 컸다. 먼저 경종이 숙종의 왕위를 물려받았고 그 뒤로 바로 연잉군이 21대 영조가 되었다. 그러나 영조는 자신을 왕위에 옹립한 노론과의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일 만큼 비정한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는 1727년(영조 3) 33세에 지은 것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왕위에 오른 영조의 굳은 의지와 삶의 가치관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어느 날 영조는 제를 지낸 후 재실에 앉아 문밖을 내다보니 외견상으로 볼품없는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휘어지고 비뚤어지고 생채기도 많은 나무에 감정이입이 된 것이다.
큰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세찬 바람과 궂은 비 그리고 거센 눈보라를 다 이겨내야만 거목으로 자랄 수 있는 법. 영조 또한 어머니에 대한 열등감, 노론과의 정치적 이해관계, 자신의 손으로 아들 사도세자를 사사賜死한 일까지, 그 어느 하나 역경이 아닌 것이 없었다. 수많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 견뎌내야만 큰 나무가 되는 자연의 순리처럼 영조는, 앞으로 다가올 그 어떠한 시련과 역경을 잘 이겨내려는 굳은 의지를 조심스럽게 드러냈다. 글/사진 이태훈. 에디터 박성일기자 rnopark99@as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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